왜 나이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인가
사기 전화는 상대가 똑똑한지 아닌지를 가려서 걸지 않습니다. 검찰을 사칭해 겁을 주고, 시간을 재촉하고, 통화를 끊지 못하게 붙잡아 둡니다. 그 상황에서는 누구나 판단이 흐려집니다. 나이 든 부모님만의 문제가 아니라 수법이 사람의 조급함을 노리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막는 방법도 사람의 판단에 기대지 않는 쪽이 낫습니다. "모르는 전화는 받지 마세요"라고 당부하는 것보다, 돈이 실제로 빠져나가는 통로에 시간과 한도를 걸어 두는 편이 확실합니다. 통화 중에는 설득당해도, 3시간 뒤에 정신이 들면 되돌릴 수 있습니다.
아래 장치들은 모두 제도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특별한 사정을 설명할 필요도, 진단서를 낼 필요도 없습니다. 은행에 신청하면 그만입니다.
신청하지 않아도 이미 걸려 있는 것
먼저 이미 작동하고 있는 장치가 있습니다. 지연인출제도입니다. 한 번에 100만원 이상이 입금된 계좌에서는 입금된 때부터 30분 동안 자동화기기(ATM 등)로 그 금액만큼 뽑거나 이체할 수 없습니다. 중간에 다른 거래로 잔액이 바뀌어도 입금된 금액을 한도로 30분이 유지됩니다. 다만 은행 창구에서는 즉시 인출됩니다.
이 제도는 입출금이 자유로운 예금을 다루는 곳이면 대부분 적용됩니다. 은행, 우체국, 농협·수협·축협과 산림조합, 신협, 새마을금고, 저축은행, 일부 증권사가 들어갑니다.
카드론에도 비슷한 장치가 있습니다. 그 카드사에서 카드론을 처음 쓰는 사람이 300만원 이상을 신청하면, 승인이 난 뒤 2시간 지연해서 입금됩니다. 300만원 미만이거나 전에 그 카드사에서 카드론을 쓴 적이 있으면 대상에서 빠집니다.
오늘 은행에서 걸 수 있는 네 가지
여기서부터는 신청해야 걸립니다. 네 가지 모두 해당 금융회사 인터넷뱅킹이나 스마트뱅킹, 영업점 방문으로 신청합니다. 은행마다 세부 내용에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연이체서비스는 이체한 돈이 수취인 계좌에 최소 3시간 뒤에 들어가도록 미루는 서비스입니다. 지연 시간은 최소 3시간 이상에서 골라 정할 수 있고, 최종 이체처리시간 30분 전까지는 취소할 수 있습니다. 이 서비스를 써도 본인이 따로 건별 한도(최대 100만원)를 정해 두면 급할 때 즉시이체를 쓸 수 있고, 같은 은행 본인 계좌끼리 보내거나 미리 등록해 둔 계좌로 보내는 경우에도 즉시 나갑니다. 창구 거래에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입금계좌지정서비스는 미리 지정해 둔 계좌로는 원래 이체한도 안에서 자유롭게 보내되, 지정하지 않은 계좌로는 하루 100만원까지만 보낼 수 있게 묶는 서비스입니다. 사기범이 알려주는 낯선 계좌로 큰돈이 한 번에 나가는 것을 막습니다. 이것도 창구 거래에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해외 IP 차단 서비스는 국내에서 쓰는 IP 대역이 아니면 이체를 막는 서비스입니다. 정보가 새어 나가 해외에서 돈을 빼내려는 시도를 막습니다. 은행에 따라 제공하지 않는 곳도 있습니다.
65세 이상이면 가족에게 문자가 갑니다
2019년 10월부터 65세 이상 고객이 원하는 경우, 일부 금융상품에 가입할 때 미리 정해 둔 가족이나 지인에게 가입 사실을 문자로 알려 주는 서비스가 운영되고 있습니다. 금융위원회가 「금융소비자 보호 종합방안」 후속조치로 마련한 제도입니다.
대상 상품은 내용이 복잡하거나 위험이 큰 것들입니다. 보험에서는 종신보험, 중대질병보험(CI보험), 변액보험이 들어가되 월 보험료 5만원 이하 소액보험은 빠집니다. 금융투자상품에서는 파생결합증권(ELS·DLS), 장외파생상품, 조건부 자본증권, 자산유동화증권, 후순위 채권, 파생형 펀드 등이 대상입니다. 대면으로 가입한 경우에 우선 제공되고, 인터넷 가입은 빠집니다. 전문투자자나 전문보험계약자도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절차는 이렇습니다. 금융회사가 대상 고객인지 확인하고, 본인에게 이 서비스를 쓸 것인지 묻고, 지인 중 한 사람을 지정하게 하고, 그 사람의 동의를 받은 뒤, 지정인에게 안내 문자를 보냅니다. 수집하는 정보는 지정인의 이름, 계약자와의 관계, 휴대폰 번호로 한정됩니다.
중요한 것은 문자를 받고 나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점입니다. 보험은 청약 후 30일, 보험증권을 받은 뒤 15일 이내에 청약을 철회할 수 있습니다. ELS는 고령투자자에게 적용되는 투자숙려기간이 있어 청약을 철회할 수 있습니다. 금융위원회가 든 사례에서도 66세 가입자가 딸과 상의해 변액연금보험 청약을 철회하고 조건이 맞는 다른 상품으로 옮긴 경우가 나옵니다.
이 서비스는 본인이 희망하는 경우에만 제공됩니다. 부모님이 상품에 가입하실 때 "지정인 알림서비스를 신청하겠다"고 먼저 말씀하셔야 걸립니다.
판단이 어려워지기 전에 해 둘 것
치매 진단을 받은 뒤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줄어듭니다. 계좌를 정리하거나 대리인을 정하는 일에 법원 절차가 필요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직 판단에 문제가 없을 때 해 두면 나중이 훨씬 수월합니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위에 적은 지연이체와 입금계좌지정을 걸어 둡니다. 둘째, 부모님이 쓰시는 계좌가 몇 개이고 어디에 있는지 함께 정리해 둡니다. 금융감독원 파인(fine.fss.or.kr)에서 본인 계좌를 한눈에 볼 수 있으니 부모님과 같이 앉아 확인하시면 됩니다. 셋째, 대출이나 카드 발급 시도를 바로 알 수 있도록 문자 알림을 켜 둡니다.
법원의 성년후견이나 임의후견 제도도 있습니다. 다만 요건과 절차, 비용이 사안마다 달라 여기에 단정해 적지 않겠습니다. 필요하다고 판단되시면 대한법률구조공단 132에 상황을 그대로 말씀하시고 무료 상담을 받으시는 편이 정확합니다. 소득 요건에 해당하면 소송대리까지 지원받을 수 있습니다.
이미 돈이 나갔다면
가장 먼저 할 일은 지급정지입니다. 112 또는 돈이 빠져나간 금융회사 콜센터에 전화해 계좌를 막습니다. 이건 분 단위로 결과가 갈립니다. 사기범이 인출하기 전에 계좌가 묶여야 돈이 남아 있습니다.
그다음이 신고와 상담입니다. 금융감독원 불법사금융·보이스피싱 신고는 1332이고, 불법사금융 상담은 3번입니다. 금융감독원 콜센터 1332의 0번은 보이스피싱 피해 상담과 신고입니다.
부모님이 알려주지 않으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식에게 폐를 끼쳤다고 여기시거나, 스스로를 탓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왜 그런 걸 믿으셨냐"고 묻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사기는 당한 사람의 잘못이 아닙니다. 지금 할 일은 계좌를 막는 것이고, 그건 시간과의 싸움입니다.
